어느 날 오른쪽 정강이가 무엇에 쓸린 것처럼 쓰라리고 아팠다. 바지를 걷고 보니 피부가 벌겋고 화끈거렸다. 어디선가 부딪히거나 쓸렸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에 씻으려고 욕실에 갔을 때 정강이가 반쯤 물집이 잡혀 있는 게 보였다. 겁나는 마음도 들고 걱정이 돼서 출근 전에 동네 의원에 들렀다. 대상포진이 의심된다고 했다. 대상포진은 많이 아프다던데 못 견디게 아프지는 않았지만 항생제와 항생연고를 처방받았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턴가 없던 피부 알레르기도 생기고, 늘 피곤하고 힘들었다. 회사의 업무량을 생각해보면 누구 하나 실려나가거나 과로사를 당해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나일수 있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모처럼 주말에 시간이 나서, 서점에 들를까 마음먹고 외출했다. 마지막으로 읽은 책이 무엇인가 생각해봤다. 업무를 위해서 읽는 논문들과 매뉴얼, 참고서적을 빼면 마지막에 읽은 책은 '사피엔스'였다. 2년 동안 일이 아닌 책 읽기를 하지 않다니. 서점이 아니라 카페에 앉아 낙서를 하면서 고민했다. 길게 잡아야 십 년 정도 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돈을 많이 쓰는 편은 아니지만, 지금 은퇴할 만큼 돈을 모으지도 못했다. 하지만 계속 일하다가는 갈려나갈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일이 재미없었다. 그다음 주 바로 퇴사 신청했다.
인수인계하면서, 제주도에 있는 회사에 지원을 했다. 요구사항이 신입사원에게 맡기는 정도의 일이어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처음엔 제주도에 가면 뭐할까 생각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이 이후의 삶에 이르렀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한다고, 일하는 동안 행복할 것 같지는 않았다. 거의 십 년을 그렇게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즐겁지 않으면 직장을 바꿀게 아니라 일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은퇴 노후 이런 거 생각하기보다. 모아둔 돈으로 살면서 공부해도 새로운 일로 벌어먹고 살면 될 것 같았다. 면접을 보라는 지원회사에 응시를 포기하겠다고 전했다. 말 그대로 무작정이었다.
우선은 책 읽는 근육을 다시 늘려야 해서 책을 읽었다. 확실히 예전보다 집중력이 떨어졌다. 하지만 새로운 내 일은 그 전과 마찬가지로 기본은 공부이기 때문에. 대신 이전과는 다르게 커리큘럼 느낌도 없고 손가는 대로 아무거나 읽었다. 족보 없는 책 읽기. 인문학, 자연과학, 실용서, 입문서, 자기 계발... 족보가 없다. 유튜브에도 정보들이 넘쳐났다. 구글 검색 못지않게 유튜브 검색을 하면 웬만한 정보는 다 있다. 다만, 대부분은 키워드 나열이다. 미디어 특성상 깊은 사유를 공유할 수는 없지만, 알고 싶은 키워드의 방향을 큰 시간 들이지 않고 찾을 수 있다. 특히 책으로 배울 수 없는 여러 가지도 찾아볼 수 있다.
지금까지는 굉장히 두리뭉실하게 이것저것 해보고 있다. 몇 년을 공부해도 될 것 같다고 생각했지 무엇을 할지 결정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십 대로 돌아간 느낌이다. 불안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불안하지는 않다. 회사 못지않게 바쁘다. 일어나서 움직여야 하고 밥도 해야 하고 책도 읽어야 하고, 십 년 만에 영어 공부도 한다. 어휘력에 의문이 생겨서 한자도 보고 있다. 대신 너무 피곤하면 낮잠도 잔다. 집중이 안되면 산책도 하고, 느긋하게 카페에서 책을 보거나 생각나는걸 막 적을 때도 있다.
최악의 상황은 돈이 생각보다 일찍 떨어져 예전 일거리를 찾아 구직을 하는 것이겠지. 다행히도 그 시간은 당분간 미루어졌다. 주식에서 수익이 좀 났다. 주식도 공부의 일환이었는데 수익까지 가져다 줬다. 내가 배운 것과 공부한 것과 유사한 부분이 있는 일종의 시험장이랄까. 운이 좋았다. 예전에 그렇게 벌어보려고 할 때는 힘들더니 역시 테크닉보다는 마인드인 것 같다.
현재까지는 퇴사가 잘한 선택인 것 같다. 후회 같은 걸 많이 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이번에도 당시에 내릴 수 있는 가장 좋은 결정이었다. 인간은 언제나 최선의 결정을 내린다. 자연과 사물과 인간의 마음은 항상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게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자연의 법칙이다. 그러니 후회할 필요도 없고 후회해도 소용도 없다. 십 년 후가 궁금하다. 십 년 전에 지금을 예상 못했 듯이 전혀 예상 못한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예상 가능한 일은 신나지는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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