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물학자나 뇌과학자는 아니지만 감정이나, 생각, 반응과 행동이 호르몬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사실은 상식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일까? 최근 들어 감성적이 되어 전에 듣지 않던 노래에 집중하거나, 영화에 더 감동을 느끼 적도 많고, 나 자신과 인생에 대해서 가만히 생각하고 있는 경우도 잦아졌다. 예전엔 잔정이 없고 냉정하단 소리를 들었는데, 지금은 일전에 대화를 나눌 때 혹여 말실수를 한 것은 아닌가 걱정하고 특히 젊은 사람들과 대화에 신경을 쓰기도 한다.
신체적인 변화도 눈에 띈다. 상처가 잘 아물지 않고 어깨와 등이 결린다. 어렸을 적에 할머니께서 무릎이 시리다며 바람들어 온다고 문 닫으라고 자주 말씀하셨는데, 무릎이 시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됐다. 가장 불편한 변화는 눈이 침침해지는 거다. 아직 돋보기를 장만하지는 않았지만, 가까이 있는 것이 잘 보이지 않아서 안경을 벗고 스마트폰이나 책을 보아야 한다. 안경을 벗는 수고는 감당하겠는데, 오랫동안 보고 있으면 눈이 따끔거리기도 하고 흐릿해져서 한참을 쉬어줘야 한다.
마음도 변하고, 몸도 변하는 이런 나이를 갱년기라고 하지만, 나는 굳이 오춘기라고 하면서 다닌다. 사춘기에 할 법한 고민들이 기억나지 않아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누구이며 어떤 정체성을 가져야 하는가 그리고 인생의 의미는 무엇일까 생각한 기억이 없다. 단지 대학에 갈 수 있을까, 등록금은 어떻게 할까와 같은 고민과 가정이나 처지에 대한 불만이 대부분이었다. 나이가 들고 일상을 살아가면서 가끔 이렇게 살아도 되나 싶다가도 그냥 생활인으로 금세 돌아갔다. 프로젝트를 하고 월급을 받고, 그 돈으로 살아간다. 습관적으로 먹고 쓰고 자고 출근하고 퇴근하고...
찬바람이 불어서, 가을 되어서 아니면 호르몬 때문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정체성을 찾고 싶어졌다. 그저 주어진데서 최선을 다해 살아왔던 날들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할 때 가장 기쁜 사람인지 다시 고민이 된다. 나는 그림을 배운 적 없지만 한 때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시험기간에도 도서관 구석에서 책을 쌓아놓고 읽기도 했고. 글을 쓰고 싶어 무작정 끄적이기도 했다. 그런데 4B연필을 잡아본지 20년은 된 것 같고, 한 달에 책 한 권 읽지 못한 적도 있고, 글이라고 해봐야 가끔 일기를 쓰는 게 전부다.
문구점에서 4B연필과 연습용 스케치북을 샀다. 연필을 미술용으로 깍고 손에 쥐니 너무도 어색했다. 스케치북이 대면 대면해서 이면지에 선긋기를 해봤다. 제대로 그어질 리가 없다. 무엇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고, 내가 좋아하던 때를 되돌리고 싶었다. 명암도 열심히 넣어보고 나서 첫 시도 치고 나쁘지 않았다고 위로해본다. 한 오 년쯤 그리면, 옛날 즐겨보던 만화처럼은 아니어도, 그냥 사람들이 읽어주는 웹툰 작가는 될 수 있을까? 괜히 상상도 해본다.
늘 그랬 듯이 일상의 분주함이 호르몬을 압도해서 금세 잊힐 백일몽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연필과 스케치북이 금세 어느 구석에 쳐박혀, 만화는 커녕 다시 선긋기도 안 할 가능성이 있겠지. 하지만, 둘리와 로봇 태권브이를 자유자재로 그리던 친구가 자신의 만화책이라며, 보여준 그림들이 신기해서 집에 돌아와 열심히 보물섬을 따라 그리던 그때의 기분을 다시 들어서 좋았다. 먹고사는 걱정만으로 살아가는 인간이 아닌 기분이 유쾌했고, 이 나이에도 원하면 꿈을 꿀 수도 있다는 사실이 감사했다.
내 꿈이 어떤 것으로 바뀔지, 자랄지, 혹은 한순간 사라질 지도 모르지만, 사춘기 시절에 느끼지 못했던 행복한 기분을 오춘기에 느끼고 있다. 오십은 꿈꾸기 좋은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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